독서

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 (문학동네)

love_ms 2020. 3. 11. 10:35

 

 

권여선 / 아직 멀었다는 말

 

책의 표지가 굉장히 예쁘다. 굉장히 서정적이고 치유될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첫 단편 '모르는 영역'부터 마음을 조금씩 아프게 하기 시작하고, 두 번째 단편인 '손톱'은 정말 슬픈 소설이다. 나에게 이 책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덮어주는 게 아니라 상처를 보여주고 정확하게 보라고 말하는 책이었다.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드디어 다 읽었다. 읽기 어려운 소설들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지루한 소설들도 아니었는데, 마음이 멍해지고 실제로 겪은 것처럼 아릿해져서 쭉 읽기가 힘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알 수 없는 쓸쓸함, 적막감이 느껴진다.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것들이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라 마음이 이상했다. 현실에서 겪고 있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체감하고 있기 때문에 선뜻 부당하다고 말 못하고 '원래 그런 거지'라며 타협해온 것들에 대한 이야기. 주인공들도 딱히 세상의 불공정함과 부당함에 저항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나처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소설속의 환경이, 내가 아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왔고 그것때문에 힘들어했던 것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모르는 영역'에서는 서로의 진심이 자꾸 엇갈리는 아빠와 나의 관계가 떠올랐다. '너머'에서는 요양원에 계시다가 재작년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생각났다. 영양액만 맞으시고 음식은 먹지 않아 살이 하나도 안 남으시고 앙상해졌던 할머니. 뿐만아니라 모든 소설들의 화자가 나처럼, 내 이웃처럼 느껴진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는 딱히 잘못한 인물이 없다. 서로가 잘못이 없는데 사회구조 때문인지 서로에게 죄인이 되고 상처가 된다. 죄 없는 사람들만 있는데 상처가 생기는 현실.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느낀 나의 쓸쓸함, 아릿함에 대해서 아는 데에는 작품 해설이 도움이 되었다.

"이 인물들이 아픈 것은, 이들이 개별적으로 병에 걸린 환자여서가 아니라 가학적인 환경에 노출된 약자이기 때문이다. 반복건대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다. 그들의 고통에서 당신이 슬픔을 느꼈다면, 그 고통의 당사자를 불행의 주인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의 부정을 대신 겪어내는 누군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 슬픔은 누군가의 단독적인 아픔을 알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들 사이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가 타인에 대해 느낀 슬픔은 공감보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아직 멀었다는 말 이라는 게 표제작이고, 이 소설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 말은 소설집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생각해보니 작가의 말에서 나온다.

 

"그래도 독자여 나의 눈물겨운 독자여 내가 더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그날이 오면 부디 우리 다시 만날까 작가의 말도 모르겠다는 말도 아직 멀었다는 말도 하지 말고 나는 식어 차고 당신의 손은 따뜻한 그날에"